“성폭력 트라우마, 호신술로 떨쳤죠”

“성폭력 트라우마, 호신술로 떨쳤죠”

강신 기자
강신 기자
입력 2016-09-01 22:52
업데이트 2016-09-01 2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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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 피해자 보호시설 열림터

8주간 자기방어훈련 통해 변화… “맞서 싸울 자신감 생겼어요”

“헤어진 애인에게 오랜 기간 스토킹을 당했던 A씨는 집 주변과 직장 근처에서 강제 추행도 당했었다고 해요. 직장을 그만두고 주민등록번호까지 바꾸고 이사를 갔는데도 스토커가 계속 나타난 거죠. 아예 집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는 상태가 돼서 보호시설에 온 겁니다. A씨의 재기는 호신술을 배우며 가능했어요. 다급한 상황에서 가해 남성을 호신술로 제압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긴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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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법인 한국성폭력상담소가 지난 6월 일반 여성을 대상으로 서울의 한 대학교 체육관에서 진행한 ‘자기방어특강’ 참가자들이 수업에 앞서 달리기를 하며 몸을 풀고 있다. 가운데는 수업을 진행한 김기태 ASAP여성호신술 대표. 일반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이날 수업과 별개로 성폭력상담소 부설 성폭력 피해자 보호시설 ‘열림터’에서도 2014년부터 자기방어특강 프로그램을 매년 1회 총 8주 16회 수업으로 진행한다. 한국성폭력상담소 제공
사단법인 한국성폭력상담소가 지난 6월 일반 여성을 대상으로 서울의 한 대학교 체육관에서 진행한 ‘자기방어특강’ 참가자들이 수업에 앞서 달리기를 하며 몸을 풀고 있다. 가운데는 수업을 진행한 김기태 ASAP여성호신술 대표. 일반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이날 수업과 별개로 성폭력상담소 부설 성폭력 피해자 보호시설 ‘열림터’에서도 2014년부터 자기방어특강 프로그램을 매년 1회 총 8주 16회 수업으로 진행한다.
한국성폭력상담소 제공
●처음엔 남자 선생님에게 거부감

1일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설 ‘열림터’(성폭력 피해자 보호시설)의 이어진(37·여) 부원장은 “현재 8명의 피해자가 시설에 사는데, 공포심에서 벗어나도록 2014년부터 ‘자기방어훈련’이라는 제목으로 호신술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일주일에 2번씩 총 8주간 가르치는데 올해는 지난달 말 수업이 끝났다.

이 부원장은 “처음에는 고작 8주 배워서 뭐가 달라지겠느냐고 말하는 피해자도 있었다”며 “무엇보다 올해부터 남자 선생님이 가르치도록 하자 동요가 컸다”고 설명했다. 안전한 공간에서 검증된 신분의 남성에게 호신술을 배우며 트라우마를 극복해 보자는 취지였는데, 누구보다 성폭력 피해자들을 잘 안다고 생각했던 이 부원장도 놀랐을 만큼 피해자들의 남성 거부감이 컸다고 했다. 실제로 이론 수업은 비교적 순조롭게 끝난 반면 실전 수업에서 잡힌 팔을 뿌리치는 동작, 억지로 안고 있는 상황에서 탈출하는 법 등 신체 접촉이 시작되자 피해자들은 교사를 남성으로 생각하고 두려워했다.

결국 3주째부터 피해자끼리 짝을 지어 밀기, 당기기 등 간단한 호신술을 연습하게 했다. 수업을 진행한 김기태(40) ASAP여성호신술 대표는 “3주차부터 농담에 웃기 시작했고, 여유가 생겼다”며 “5주차 발차기 수업 때는 서로 나와 실습하겠다고 해서 줄까지 섰다”고 말했다.

남자와 몸을 스치는 것도 두려워하던 피해자들은 6주가 지나자 남성 교사에게 눌린 상황을 빠져나오는 기술도 연습할 수 있었다. 8주차에는 극단적인 상황을 가정해 교육이 진행됐다. 남성 가해자가 피해자의 몸에 올라타 옷을 벗기려 할 때 강하게 저항하고 최대한 빨리 일어나 탈출하는 것이었다. 김 대표는 “자신이 당했던 성폭력이 떠올랐는지 몇몇 피해자는 눈물을 터뜨렸다”며 “하지만 8명이 모두 실습에 성공했다”고 말했다.

●가해자 닮은 사람 만나도 안 피해

A씨는 8주차 교육이 다 끝난 지난달 28일 입소 이후 처음으로 열림터에서 나가 친구를 만났다고 했다. 길거리에서 스토커와 닮은 남성을 만나 심장이 멎을 것 같았다고도 했다. 다시 발길을 돌려 열림터로 가려 했지만 용기를 내 남성의 얼굴을 확인하고 스토커가 아닌 것을 확인했다. 김 대표가 당시 A씨의 말을 전했다.

“호신술을 배우기 전에 ‘나는 할 수 없을 거야’라고 생각했어요. 이미 무기력하게 가해자에게 당한 경험이 있으니까요. 이제는 아니에요. 여자가 싸우지 못하는 건 마음속 싸움에서 이미 졌기 때문이래요. 맞서 싸울 자신감이 생겼어요.”

강신 기자 xin@seoul.co.kr
2016-09-02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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