솜방망이 판결·징계로 성폭력 피해·가해자가 함께 학교에

솜방망이 판결·징계로 성폭력 피해·가해자가 함께 학교에

입력 2016-11-02 08:05
업데이트 2016-11-02 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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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아마 잘 살 것이다. 나처럼 소화불량에 걸리지도 않을 것이고 불면증에 괴로워하지도 않을 것이다. 택시에서 강제추행이 일어났기 때문에 나는 그 이후로 택시를 타지 않지만 너는 별생각 없이 탈 수 있을 것이다. (…) 네 선배와 네 교수이지만 동시에 나의 선배와 나의 교수도 되는 사람들이 너의 미래만을 생각해 탄원서를 작성하고 감형을 도왔기 때문이다.”

서울 유명 사립대에서 성폭력 가해 학생이 피해 학생과 함께 계속 학교에 다니게 되는 상황이 벌어져 논란이 일고 있다.

2일 고려대와 고려대 여학생위원회에 따르면 2년 전 동료 학생인 서모(24)씨에게 성폭력을 당한 A(여)씨는 이번 학기부터 서씨와 함께 학교생활을 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서씨는 2014년 10월 A씨와 함께 택시를 타고 이동하면서 당시 만취 상태였던 A씨의 신체를 만지고, 택시를 서울 성동구의 한 숙박업소 앞에 세운 뒤 모텔로 끌고 가려 하는 등 강제추행했다.

1심 법원인 서울북부지법은 초범인 데다 어린 대학생이며, 지도 교수와 선배들이 선처를 탄원하고 있다는 이유 등을 들어 서씨에게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 성폭력 치료강의 80시간 수강과 사회봉사 80시간을 선고했다.

그러나 서씨의 항소로 올해 1월 열린 항소심에서 재판부인 서울북부지법 형사1부(홍승철 부장판사)는 원심이 너무 무겁다며 벌금 700만원에 성폭력 치료 프로그램 40시간 이수로 형을 감형했다.

서씨가 피해자와 합의하지 못했지만, 들뜬 분위기에 술에 취해 우발적으로 저지른 범행이며 피해자와 다시 마주치지 않을 방편으로 의무경찰 입대 신청을 했다는 이유였다.

또 피해자가 학교 양성평등센터에 신고해 열린 고려대 학생상벌위원회는 지난해 3월 서씨에 대해 두 학기 정학(지난해 2학기까지 정학) 처분을 내렸다.

그러나 서씨는 실제로 의무경찰에 입대하지 않고, 항소심 판결이 나온 지 반년만인 올해 9월 학교에 복학했다.

A씨는 최근 학교에 대자보를 붙여 성폭력 가해자와 함께 학교에 다녀야 하는 상황을 고발하고 가해자와 남성에게 유리한 사회적 상황과 주변의 반응을 비판했다.

고려대 여학생위원회는 “서씨가 자숙의 기간을 가지라는 양성평등센터의 지시를 어기고 동아리 활동을 하는 등 교내를 돌아다녀 A씨의 학교생활은 자유롭지 못했다”며 “이런 상황에서 서씨 징계와 관련해 A씨에게 주어진 재심의 요청 기간은 단 열흘뿐이었다”고 지적했다.

피해자와 위원회는 서씨에 대한 재심의를 진행해 퇴학 처분하고 재심의 규정을 고칠 것을 학교에 요구했다. 그러나 고려대 측은 이미 징계가 확정된 사건에 대한 재심의는 어렵다고 설명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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