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100주년 프로젝트-독립운동가의 명패] “3·1운동 1주년 재현 16세 소녀가 내 어머니라니… 자부심 느껴”

[3·1운동 100주년 프로젝트-독립운동가의 명패] “3·1운동 1주년 재현 16세 소녀가 내 어머니라니… 자부심 느껴”

이경주 기자
이경주 기자
입력 2018-11-05 22:46
업데이트 2018-11-06 0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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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잊혀질 뻔한 故소은명 지사

소녀 6명, 배화여학교서 “독립 만세”
소 지사, 징역형 받고 1개월여간 옥고
98년 만에 유공자로… 후손에 서훈 전달
“늦게나마 위대한 분인 걸 알게 돼 기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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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은명 지사의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 배화여학교 만세재현운동으로 옥고를 치를 때 모습이다. 국가보훈처 제공
소은명 지사의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 배화여학교 만세재현운동으로 옥고를 치를 때 모습이다.
국가보훈처 제공
“몇 달 전에 조카가 전화를 해 할머니 이름이 신문에 났다는 겁니다. 제가 어릴 때 어머님이 한두 번 지나가는 말로 여학교를 다니던 시절에 만세운동을 하다 왜놈에게 끌려갔었다고 했는데 그게 진짜였던 거죠. 자부심이 들었습니다.”

이중래(80)씨는 5일 서울신문과의 전화인터뷰에서 어머니 고(故) 소은명 지사에 대해 “하지만 평생을 너무 가난하고 힘들게 살았다”고 안타까워했다.

소 지사는 김경화, 박양순, 성혜자, 안옥자, 안희경 지사 등과 함께 1920년 3월 1일 자신이 다니던 배화여학교 기숙사 뒤편 언덕과 교정에서 “조선 독립 만세”를 외치다 일본 경찰에 검거됐다.

3·1운동이 열린 지 1주년을 맞아 일제의 감시가 삼엄했지만 어린 여학생이 만세 운동을 결행한 것이다. 당시 신한민보에는 조선총독부는 미리 배화여학교를 포함한 선교회 부속학교에 엄중히 학생을 단속할 것을 경고했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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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화여학교 만세재현운동에 대한 경성지방법원의 1920년 4월 5일 판결문. 내용은 ‘손병희 등이 조선독립의 선언(1919년 3월 1일)을 하여 다중이 취합한 곳에서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한 바 있으며 마침1920년 3월 1일은 이 선언의 기념일에 해당하여 피고(소은명 지사를 포함한 6명의 여학생) 등은 서로 공모하여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함으로써 치안을 방해한 자이다’라고 기술함.  국가보훈처 제공
배화여학교 만세재현운동에 대한 경성지방법원의 1920년 4월 5일 판결문. 내용은 ‘손병희 등이 조선독립의 선언(1919년 3월 1일)을 하여 다중이 취합한 곳에서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한 바 있으며 마침1920년 3월 1일은 이 선언의 기념일에 해당하여 피고(소은명 지사를 포함한 6명의 여학생) 등은 서로 공모하여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함으로써 치안을 방해한 자이다’라고 기술함.
국가보훈처 제공
하지만 곳곳에서 만세재현운동이 있었다. 특히 당시 육군성의 사건 서류에는 ‘배화여학교와 진명여학교 학생들은 오전 8시 30분쯤부터 교내에서 만세를 부르고 서대문 감옥 태평동 출장소 수인(옥에 갇힌 사람) 약 200명은 0시 25분 및 오후 6시 15분쯤에 두 차례 만세를 불렀다’고 명시돼 있다. 소 지사는 당시 16살로 6명 중 가장 어렸다. 이후 그는 조선 독립 만세를 크게 외쳐 치안을 방해한 혐의로 검사국에서 취조를 받았고 같은 해 4월 열린 재판에서 징역 6월·집행유예 2년의 형을 받았다. 또 실제 1개월 5일간 옥고를 치렀다.

소 지사 등 6명은 국가보훈처가 올해 여성·학생 독립운동가 발굴에 나서면서 지난 광복절에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았다. 무려 98년 만이었다. 독립유공자 중 여성 비율이 2%에 불과한 것을 감안할 때 이들의 만세 운동은 더욱 높이 평가된다. 하지만 후손이 나타나지 않아 정부는 2개월이 넘게 서훈(대통령 표창)을 전달하지 못했다.

그러다 소 지사의 후손이 언론 보도를 보고 보훈처에 연락했고 인천보훈지청은 지난달 30일 소 지사의 장녀인 이복래(83)씨에게 서훈(대통령 표창)을 전달했다. 이씨는 “말할 수 없이 기뻤다”고만 했다. 보훈처는 곧 ‘독립운동가의 명패’도 전달할 계획이다.

가족에 따르면 소 지사는 한때 유치원 교사로 일했지만 6·25전쟁 때 남편과 사별하고 8남매를 돌봤다. 빵을 머리에 이고 집집마다 다니며 팔아 입에 풀칠을 했다고 가족은 전했다.

아들 이씨는 “자식들도 흩어져 결국 어머니가 3명만 데리고 있게 됐고 누이는 남의 집 식모살이를 했다. 힘든 시절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소 지사를 ‘온화하지만 중요할 땐 정말 냉철했다’고 기억했다. 이씨는 “학교를 못 다니는 제게 알파벳을 가르쳐 줄 정도로 어머니는 당시 여성으로서 많이 배운 분이었다”며 “말수도 없이 늘 곧고 진중한 분이셨는데 뒤늦게나마 위대한 분이란 걸 알게 됐다”고 말했다. 소 지사는 1986년 81세의 나이로 운명했다.

이경주 기자 kdlrudwn@seoul.co.kr
2018-11-06 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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