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업식씨가 지난달 28일 오후 서울 송파구 방이동에 있는 택시회사 차고지에서 ‘길 위에서 쓴 편지’ 노트를 들고 있다.
승객들에게 노트 한 권을 건네며 숙제를 내주는 택시기사가 있다. ‘길 위에서 쓴 편지’라고 적힌 노트다. 이를 건네받은 승객은 목적지로 가는 동안 스스로를 돌아보고, 그 속에서 기쁨과 슬픔, 고민 등 삶의 한 단편을 써 내려간다.
승객들에게 특별한 숙제를 내준 주인공은 명업식(61)씨다. 축협중앙회를 다니다 명예퇴직을 한 그는 2018년 11월 1일 택시기사로 취직했다. 막상 시작한 택시운전일은 만만치 않았다. 술에 취한 승객이나 요금이 조금 더 나왔다고 시비를 거는 승객과 마주하는 상황이 힘들었다.
택시운전을 그만둘까 심각하게 고민하던 그 순간, 그의 머릿속에 문득 떠오른 게 글쓰기였다. 지난해 11월부터 그는 승객들에게 노트를 건네기 시작했다. “생각나는 대로 아무 글이나 써 주세요.”라는 부탁의 말과 함께.
“글을 쓰기 위해서는 생각을 해야 하는데, 손님들에게 그 생각할 시간을 드려야겠다는 마음에 노트를 준비했어요. 친구와 술 한 잔 마시면서 싸웠던 일이나 가정사 등 그냥 편한 대로 아무 이야기나 적어달라고 부탁하면, 호응을 많이 해주셨어요.”
‘길 위에서 쓴 편지’ 노트에 승객들이 남긴 글.
이어 그는 “글을 쓰고 나니까 마음이 후련하고 기분이 좋아졌다는 분들이 계신데, 그럴 때면 손님과 소통이 잘 이뤄진 것 같아 기분이 좋다. 이렇게 ‘길 위에서 쓴 편지’를 시작한 후 손님과 분쟁이 거의 없어졌다”며 만족감을 표했다.
특히, 목적지에 도착해서도 택시에서 내리지 않고 글을 쓰는 승객이 있었다. 명씨는 “어떤 분은 목적지에 도착했는데, 안 내리고 두 페이지를 더 쓰셨다”며 “요금 올라가니 그만 쓰고 내리시라고 하면, 요금 걱정하지 말고 쓸 거 다 쓴다는 승객도 서너 분 된다”고 말했다.
‘길 위에서 쓴 편지’ 노트에 승객들이 남긴 글.
어느덧 3권 째인 ‘길 위에서 쓴 편지’ 노트에는 500여명의 사연이 담겼다. 길 위에서 만난 승객들이 남긴 글을 더 많은 사람과 공유하기 위해 책으로 만들 목표를 세운 명씨, 그의 택시는 오늘도 승객을 태우고 도로를 달린다.
명업식씨가 지난달 28일 오후 서울 송파구 방이동에 있는 택시회사 차고지 휴게실에서 서울신문 인터뷰에 응하고 있다.
글 문성호 기자 sungho@seoul.co.kr
영상 박홍규, 문성호, 임승범 gophk@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