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국제소송 길 열렸지만 실현 가능성은 미지수
지난 1999년 베트남 참전군인들의 제기로 시작된 ‘고엽제 피해자’ 손해배상 청구 사건이 14년간의 법적 공방 끝에 12일 대법원 판결로 일단락됐다.대법원은 2심 종료 이후 7년간의 고심 끝에 이날 1만6천여명의 원고 중 불과 39명에게만 고엽제 피해를 인정하는 선에서 사건을 마무리했다.
미국에서도 인정되지 않은 고엽제와 질병 간 인과관계를 세계 최초로 인정했다는 의미가 있지만 인정 대상과 범위를 극히 제한해 버려 고엽제 피해자에 대한 실질적인 보상 효과는 미미할 것으로 전망된다.
◇핵심 쟁점 1→2→3심 재판부 판단 엇갈려 = 당초 이번 소송이 제기되면서 부상한 쟁점은 크게 4가지였다.
우선 베트남에서 벌어진 전쟁에서 미국이 사용한 고엽제로 인해 한국 군인이 입은 피해를 어느 곳의 법원에서 다루느냐는 재판 관할권에 관한 문제였다.
국제재판관할권과 관련해 1∼3심 재판부는 모두 “대한민국 법원이 재판권을 갖는다”는 동일한 결정을 내렸다.
손해배상 소송의 전제가 되는 또 다른 쟁점 중 하나였던 고엽제의 제조물로서의 결함 여부와 관련 1심 재판부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2·3심 재판부는 “피고들은 고엽제 제조자로서 결함으로 인해 발생한 손해에 대해 제조물책임을 부담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핵심쟁점인 고엽제 노출과 참전군인들에게 발병한 질병 사이의 인과관계 유무는 1∼3심의 판단이 모두 달랐다.
1심은 “현재까지 역학조사 결과로 고엽제 성분인 다이옥신과 후유증 사이의 일반적 인과관계가 입증되지 않았고 원고들이 고엽제에 노출됐다고 보기도 어렵다”며 원고 패소로 판결했다.
반면 2심 재판부는 미국 국립과학원 보고서 등을 근거로 “고엽제 후유증 대부분은 역학조사 결과 인과관계가 인정된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당뇨병, 폐암, 후두암, 기관암, 전립선암, 비호지킨임파선암, 다발성골수종 등 11개 질병을 앓고 있는 원고 6천795명에게 상이등급에 따라 1인당 600만∼4천600만원, 총 630억7천600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2심 재판부는 그러나 말초신경병, 버거병 환자 등 다른 후유증에 대해서는 인과관계가 없다는 이유로 원고들의 청구를 기각했다.
이 같은 재판부의 판단은 대법원 상고심에서 또 한번 뒤집혔다.
대법원은 “참전군인들에게 발병한 질병 중 염소성여드름은 고엽제 노출에 따른 것”이라고 인정했지만 나머지 질병들에 대해서는 “고엽제 때문이라고 단정할 수 없고 이를 인정하기 위한 다른 증거들도 없다”며 원고 패소 취지로 파기환송했다.
이에 따라 원고 1만6천579명 중 시효가 소멸되지 않은 39명의 염소성여드름 환자만 제조사에 손해배상 책임을 물을 수 있게 됐다.
◇미국 국제소송 길 열렸지만 실현 가능성은 ‘글쎄’ = 염소성여드름에 한정된 것이지만 전 세계적으로 고엽제 노출과 질병 간 인과관계를 인정한 법원 판결은 이번이 처음이다.
미국의 베트남전 참전군인과 유족 등은 지난 1979년 7개 고엽제 제조사를 상대로 제조물책임을 구하는 집단소송을 냈다.
그러나 수년간의 증거조사 등 재판준비절차를 거쳐 본격적인 재판을 앞둔 1984년 5월 제조사가 1억8천만달러의 합의금을 지불하는 내용의 화해가 성립됐고 이후 법원 판결로 확정됐다.
당시 화해의 효력이 미치는 원고들의 숫자는 미국, 호주, 뉴질랜드 등 3개국의 참전군인 24만4천명 가량으로 집계됐다.
수많은 베트남전 참전 제대 군인과 가족의 숫자를 고려할 때 생색내기용 합의금이라는 지적도 나왔다.
특히 소송에 참가하지 않은 우리나라 참전군인들은 합의금을 받지 못했다.
이에 따라 우리나라 고엽제 피해자들은 지난 1994년 7월 미국 캘리포니아 북부지구 연방지법에 고엽제 제조물책임 청구 국제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외국인이 미국을 상대로 국제소송을 제기하기 위해서는 당사자국 대법원 최종승소 판결이 있어야 한다는 미국 연방법에 따라 이들은 자진해서 소를 취하했다.
이날 대법원에서 승소가 확정된 염소성여드름 환자 39명은 이번 확정판결을 근거로 미국에서 국제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염소성여드름 질병과 고엽제 간 인과관계에 대해서 여전히 인정하지 않고 있어 막대한 소송비용과 시간을 부담하면서 실제 손해배상 청구에 나설지는 미지수다.
미국 대법원은 2003년 6월 베트남전 참전 군인 2명이 소송을 제기한 것과 관련해 고엽제 제조회사를 상대로 피해 보상을 요청할 수 있는지에 대한 판단을 요구받자 찬성 4, 반대 4, 기권 1로 애매한 결론을 내린 바 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