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스크·장갑 없이 현장 출입한 경찰...‘특수강간’ 무죄로 뒤집혔다

마스크·장갑 없이 현장 출입한 경찰...‘특수강간’ 무죄로 뒤집혔다

박성국 기자
박성국 기자
입력 2020-12-11 15:24
업데이트 2020-12-11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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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종 전과 있던 60대, 징역 12년→무죄
범행 현장서 마스크·장갑 안 낀 경찰
법원 “핵심 증거 오염 가능성 배제 못 해”

특수강도강간 혐의로 재판에 넘겨져 1심에서 징역 12년의 중형을 선고받았던 60대 남성에게 무죄가 확정됐다. 여러 정황상 유죄가 의심되더라도 명확한 증거가 없다면 처벌할 수 없다는 취지의 판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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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 1부(주심 김선수)는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고모씨에게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고 11일 밝혔다.

고씨는 지난해 7월 8일 새벽 2시 13분쯤 제주시에 있는 2층 건물에 침입해 피해자 A양(19)의 방을 뒤지던 중 잠에서 깬 A양을 성폭행하려다 미수에 그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동종 전과 있는 60대 남성 재판에 넘긴 경·검
당시 범인은 잠결에 아버지가 방안으로 들어온 것으로 오인한 A양이 “아빠 왜?”라고 말하자 방 밖으로 나와 주방에 있던 흉기를 가져와 A양을 위협하며 가지고 있는 모든 통장을 가져오라며 협박했다. 이어 성폭행까지 시도하던 중 A양이 소리를 지르며 저항하자 도주했다.

A양은 경찰에서 범인이 모자와 마스크를 착용하고, 옷 상·하의가 모두 검은색이었다고 진술했다. 경찰은 피해자 거주지 인근 폐쇄회로(CC)TV 확인을 통해 범행시각 직전인 2시 6분쯤 주변에서 검은색 계열의 옷을 입은 남성을 포착했고, 이후 고씨로 특정해 재판에 넘겼다.

1심은 피해자가 진술한 범인의 인상착의가 고씨와 비슷하고, 유사한 인상착의를 가진 다른 사람이 CCTV에 촬영된 사실이 없는 점, 범행 시각 행적에 관한 고씨의 진술이 일관되지 않은 점, DNA 분석결과 범행에 쓰인 흉기에서 검출된 Y-STR(부계혈통검사) 유전자형 16개가 고씨와 동일한 점을 이유로 유죄로 판단했다. 이미 동종 범죄로 실형 전과가 있었던 고씨는 징역 12년의 중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2심 재판부의 판단은 달랐다. 재판부는 “피해자는 범인을 명확하게 목격하지 못한 채 옷차림만을 기억해 진술했는데, 피해자가 묘사한 범인의 인상착의는 피고인의 키, 나이와 상당한 차이가 있다”며 “CCTV 속 남자가 고씨와 동일인지 명확하지 않고, 설령 고씨가 맞다고 하더라도 범행시각 무렵 피해자 주거지 뒷골목 방향으로 이동했다는 사정만으로 범인으로 추단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며 범인이 고씨라고 단정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실제 피해자는 경찰 조사에서 범인의 인상착의를 “신장 180㎝가량의 30~40대 혹은 20대일 수도 있는데, 아빠보다 어렸다는 것은 확실하다”라고 진술했지만, 60세가 넘은 고씨의 신장은 169㎝로 피해자 진술과는 크게 달랐다. 또 피해자는 경찰이 고씨를 포함해 들려준 남성 3명의 목소리를 통해서도 범인의 목소리를 식별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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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의 부실했던 초동수사도 재판 쟁점으로 떠올랐다. 재판부는 “경찰은 범행 현장에서 흉기를 곧바로 압수하지 않고, 현장에서 철수한 후 약 6~7시간이 경과한 후에 피해자의 어머니로부터 흉기를 임의제출 받아 유전자감정을 의뢰했다”라면서 “그런데 당시 범행 현장에 출입한 경찰관은 약 10명이 이상 되는 것으로 보이고, 현장에서 과학수사팀 외의 경찰관들까지 모두 마스크와 장갑을 착용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2심 재판부 “1심 유죄 핵심 증거, 오염 가능성 있어
1심에서 유죄 판단의 핵심 증거가 됐던 유전자 분석 결과에 대한 판단도 달랐다. 재판부는 “STR 유전자 분석법은 개인 식별력이 인정되는 반면, Y-STR 유전자 분석법만으로는 동일 부계의 남성인지 여부만 확인 가능하고 인적 동일성은 식별할 수 없다”라면서 “당시 현장에 출동한 경찰관의 Y-STR 유전자 감정결과 흉기에서 나온 유전자형과 15개가 일치한다”고 경찰 조사 과정에서 증거가 오염됐을 가능성도 제기했다.

2심 재판부는 이런 배경을 종합해 원심 판단을 뒤집고 고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검찰은 이에 불복해 대법원에 상고했으나 대법원 재판부는 “공소사실에 대해 범죄의 증명이 없다고 봐, 이를 유죄로 판단한 1심 판결을 파기하고 무죄를 선고한 원심의 판단은 정당하다”며 고씨에 대한 무죄 판결을 확정했다.

박성국 기자 psk@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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