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땐 뭐든 단정해 버리기 쉽다. ‘나름 다르다’, 이런 말은 밋밋하고 설득력이 없다.
방학 때 집에 돌아오면, 한국과 외국 생활을 비교했다. 한국에선 무엇이든 신속하고 편리하고 정확하다. 길도 시원스럽다. 영국은 오래되고 낡아 불편하지만 아름답다. 풀과 나무는 짙푸르고 화려하다. 반면 한국의 색은 왠지 어둡다. 어린 나에겐 이 점이 특히 거슬렸다. 유럽의 색은 다채롭다. 사람들도, 심지어 하늘도, 잔디도 그렇다. 풀벌레도 자지러지지 않고 점잖게 우는 것 같았다.
‘아름다운 건 서양이다.’ 나는 그렇게 단정했다. 대학에서 들었던 ‘동양의 미와 예술’ 같은 강의도 나의 이런 억지를 막지 못했다. 그럴 즈음 읽었던 책이 나쓰메 소세키의 ‘풀베개’다. 나쓰메는 나처럼 영국 유학 경험이 있었다. 정확히 100년 전이다. 나쓰메도 동서양 사이에서 고민이 많았다. 이솝 우화에 나오는 박쥐처럼 쥐와 새 사이를 오갔다. 일본은 서구화되고 있었고, 나쓰메는 영문학을 공부했다. 그러다 보니 작품이 동양의 미에 대한 사유로 가득하다. 양갱을 바라보며 이런 생각도 한다.
‘서양 과자 중에서 이토록 쾌감을 주는 것은 하나도 없다. 크림의 빛깔은 약간 부드럽기는 해도 다소 답답하다. 젤리는 언뜻 보석처럼 보이지만 부들부들 떨고 있어 양갱만큼의 무게감이 없다. 백설탕과 우유로 오층탑을 세우는 짓은 언어도단이다.’(송태욱 역)
동양의 아름다움을 처음 나에게 설득력 있게 보여 준 글이었다. 감각적인 미, 서양뿐만 아니라 동양에도 있었다. 양갱에도 있고, 양갱과 같은 어두움을 품고 있는 우리 할아버지 정원 석등 위에 자란 이끼에도 있다. 양갱 하나로 나쓰메는 내가 동양의 색깔을 바라보는 태도를 바꿔 놓았다, 마치 코페르니쿠스가 우주의 축을 다시 잡았듯이.
서양의 색이 발랑 드러내놓은 색이라면 동양의 색은 감추고 여민 색이다. 무엇이 더 아름다운지는 순전히 개인의 취향이겠지만 양갱을 먹을 때마다 나는 나쓰메를 떠올리고 동양의 색을 음미하게 된다.
동시대의 일본의 또 다른 작가 다니자키 준이치로도 동양의 색과 어둠을 얘기했다. ‘음예예찬’이라는 작품에서 그는 말한다. 일본인은 원래 외광이 닿지 않는 어두운 구석의 맛을 선호하고 즐겼다. 거무스름한 그림자. 그게 일본인의 색이라는 거다(혹은 동양의 색이다). 서양식 화장실은 하얀 타일로 바닥을 깔고, 밝은 전등불로 밝히는데 일본의 화장실은 어둡다. 굳이 화장실이 훤히 밝아 민망한 얼굴을 보지 않아도 좋겠다는 게 그이의 생각이었다. 또한 옻칠한 검은 그릇에 담긴 된장국의 깊은 색을 얘기한다.
이제는 드러내놓고 이게 내 ‘색’이다 말하는 색은 부담스럽다.
이 글을 쓰면서 바흐의 ‘푸가의 기법’을 듣고 있다. 이 독일 음악보다 내 마음을 움직일 음악은 없을 듯하다. 동서양을 너무 따지면 민망하다.
김현집 미 스탠퍼드대 고전학 박사과정
‘아름다운 건 서양이다.’ 나는 그렇게 단정했다. 대학에서 들었던 ‘동양의 미와 예술’ 같은 강의도 나의 이런 억지를 막지 못했다. 그럴 즈음 읽었던 책이 나쓰메 소세키의 ‘풀베개’다. 나쓰메는 나처럼 영국 유학 경험이 있었다. 정확히 100년 전이다. 나쓰메도 동서양 사이에서 고민이 많았다. 이솝 우화에 나오는 박쥐처럼 쥐와 새 사이를 오갔다. 일본은 서구화되고 있었고, 나쓰메는 영문학을 공부했다. 그러다 보니 작품이 동양의 미에 대한 사유로 가득하다. 양갱을 바라보며 이런 생각도 한다.
‘서양 과자 중에서 이토록 쾌감을 주는 것은 하나도 없다. 크림의 빛깔은 약간 부드럽기는 해도 다소 답답하다. 젤리는 언뜻 보석처럼 보이지만 부들부들 떨고 있어 양갱만큼의 무게감이 없다. 백설탕과 우유로 오층탑을 세우는 짓은 언어도단이다.’(송태욱 역)
동양의 아름다움을 처음 나에게 설득력 있게 보여 준 글이었다. 감각적인 미, 서양뿐만 아니라 동양에도 있었다. 양갱에도 있고, 양갱과 같은 어두움을 품고 있는 우리 할아버지 정원 석등 위에 자란 이끼에도 있다. 양갱 하나로 나쓰메는 내가 동양의 색깔을 바라보는 태도를 바꿔 놓았다, 마치 코페르니쿠스가 우주의 축을 다시 잡았듯이.
서양의 색이 발랑 드러내놓은 색이라면 동양의 색은 감추고 여민 색이다. 무엇이 더 아름다운지는 순전히 개인의 취향이겠지만 양갱을 먹을 때마다 나는 나쓰메를 떠올리고 동양의 색을 음미하게 된다.
동시대의 일본의 또 다른 작가 다니자키 준이치로도 동양의 색과 어둠을 얘기했다. ‘음예예찬’이라는 작품에서 그는 말한다. 일본인은 원래 외광이 닿지 않는 어두운 구석의 맛을 선호하고 즐겼다. 거무스름한 그림자. 그게 일본인의 색이라는 거다(혹은 동양의 색이다). 서양식 화장실은 하얀 타일로 바닥을 깔고, 밝은 전등불로 밝히는데 일본의 화장실은 어둡다. 굳이 화장실이 훤히 밝아 민망한 얼굴을 보지 않아도 좋겠다는 게 그이의 생각이었다. 또한 옻칠한 검은 그릇에 담긴 된장국의 깊은 색을 얘기한다.
이제는 드러내놓고 이게 내 ‘색’이다 말하는 색은 부담스럽다.
이 글을 쓰면서 바흐의 ‘푸가의 기법’을 듣고 있다. 이 독일 음악보다 내 마음을 움직일 음악은 없을 듯하다. 동서양을 너무 따지면 민망하다.
2019-01-04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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