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美 언론인 매클래치·테일러
극동 여행 중 서울에 온 매클래치한국인 독립 열망·일제 탄압 목격
미국서 “가장 아름다운 저항” 극찬
테일러, 매클래치에게 사본 준 듯
유언에 따라 양화진 묘원에 안장
1919년 3월 서울에 머물며 3·1운동을 직접 목격한 미국 언론인 밸런타인 스튜어트 매클래치와 앨버트 와일더 테일러는 독립선언서를 미국으로 가져가 미국 매체에 전달했고 세계에 한국의 독립 열망을 알렸다. 매클래치가 쓴 3·1운동 관련 기사가 실린 1919년 4월 6일자 샌프란시스코 이그재미너 지면.
김도형 박사 제공
김도형 박사 제공
영문 3·1 독립선언서가 미국을 포함한 전 세계에 전해질 수 있었던 데는 미국의 언론인 밸런타인 스튜어트 매클래치(1857~1938)와 앨버트 와일더 테일러(1875~1948)의 역할이 컸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발행된 ‘새크라멘토 비’의 편집인이자 AP통신 이사였던 매클래치는 1919년 1월 부인과 극동 지역을 여행하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와 중국 단둥을 거쳐 3월 3일부터 6일까지 서울에 머물렀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3·1운동으로 한국인의 독립 열망과 일제의 탄압을 직접 목격했고 선교사 등과 교류하며 생생한 정보를 접했다.
그는 독립선언서를 누군가에게 받아 ‘돈을 넣는 혁대’에 숨겨 미국으로 가져갔다. 부산과 일본을 거쳐 3월 28일 하와이에 도착했다. 일본에선 ‘재팬 어드버타이저’와 AP통신 도쿄지국에 독립선언서를 넘겨줬고, 하와이에서는 지역 매체와 인터뷰를 갖고 3·1운동 소식을 전했다.
당시 AP통신 임시 특파원으로 활동한 테일러.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매클래치는 직접 쓴 3·1운동 관련 기사를 ‘아시아의 독일’이라는 책으로 엮었고 이후에도 언론·저술 활동과 재미 한인 교류를 통해 일제의 폭압과 한국의 독립 의지를 알렸다.
독립기념관 수석연구위원을 지낸 김도형 박사는 18일 “매클래치는 미국에서도 저명한 언론인이었고 이승만 전 대통령도 독립운동 지원에 고마움을 표시할 정도로 자주 연락했다”며 “다만 그가 반(反)아시아·인종주의 성향이 강해 정작 한국에서 주목하지 않았고 자료도 아직 부족하다”고 서훈이 이뤄지지 못한 이유를 설명했다. 이어 “그가 아시아를 비판한 것은 일본을 향한 것이었으며 일제에 맞선 한국의 독립운동을 알리고 지지했다”고 덧붙였다.
서울 종로구에 있는 테일러 부부의 가옥 ‘딜쿠샤’.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테일러 부부는 1942년 조선총독부의 외국인추방령으로 추방됐다. 그들이 지낸 서울 종로구의 ‘딜쿠샤’(페르시아어로 ‘기쁜 마음’이라는 뜻)는 2017년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등록됐다. 앨버트 테일러의 유해는 그의 유언에 따라 서울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안장돼 있다.
2024-08-19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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