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조정을 구조조정하라] “설거지 시켜놓고 수갑 채우는데…” 누가 총대 메나

[구조조정을 구조조정하라] “설거지 시켜놓고 수갑 채우는데…” 누가 총대 메나

백민경 기자
백민경 기자
입력 2016-06-20 22:56
업데이트 2016-06-21 0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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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똑한 면책으로 ‘변양호 신드롬’ 극복을

“발령 내면 연수 가겠다” 공무원들 기피
美 GM 구조조정때 면책조항부터 만들어
잘잘못 따지려면 법률적 책임에 국한해야

2003년 길거리를 지나던 이들은 소득이 없어도 신용카드를 발급받을 수 있었다. 현금서비스를 받아 카드 돌려막기를 하는 이들이 늘어났다. 연체율은 치솟았고 카드사는 자금난에 빠졌다. 특히 카드사 중 처음으로 1000만명 고객을 유치한 LG카드의 타격이 심했다. 정부가 출자전환 방식으로 모그룹인 LG를 끌어들이려 했지만 실패했다. 은행들은 “감당이 안 된다”며 손을 들었다. 결국 국책은행인 ‘산업은행의 위탁관리’로 결론 났다.

그러자 산은이 부글부글 끓었다. “실컷 설거지 시켜놓고 나중에 수갑 채우는 것 아니냐”는 반감이었다. 당시 김대중 정부는 유지창 산은 총재 앞으로 공문 한 장을 보냈다. “구조조정 과정에서의 손실은 일절 문제 삼지 않겠다”는 내용이었다. 서민경제 타격 등을 감안해 정권 차원에서 ‘LG카드 살리기’를 결정했고, 구체적인 집도의 역할을 산은에 맡긴 것이다. 이에 유 총재는 임직원에게 이메일을 보내 “LG카드를 맡게 된 이상 반드시 회생시키자”고 독려했다. 이후 LG카드는 2007년 신한금융그룹에 매각됐고 신한카드와 통폐합된 뒤 카드업계 1위를 달리고 있다. ‘성공적인’ 구조조정으로 종종 거론되는 사례다.

이런 ‘면책’ 풍토는 지금은 찾아보기 힘들다. 되레 정부가 ‘보이지 않는 손’으로 사실상 모든 결정을 해놓고 문제가 생기면 관련자를 희생양 삼는 일이 적지 않다. 임종룡 금융위원장은 지난 8일 기업 구조조정 관련 백브리핑에서 “미국이 2008년 GM(제너럴모터스)을 구조조정할 때 최초로 만든 법률이 관련자 면책 조항”이라며 “모든 것을 결과만 놓고 재단한다면 아무도 구조조정 업무를 맡으려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공무원들 사이에서는 구조조정을 안 맡으려는 분위기가 팽배하다. 한 경제관료는 “발령을 내면 연수를 가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고 전했다.

한 시중은행 구조조정 실무자도 “조선업이 어려워지기 시작한 것은 2013년인데 새 정부 들어서자마자 (대량 실업과 연쇄 도산이 불가피한) 구조조정을 할 수 있었겠느냐”면서 “그때 (산업은행 등 국책은행이) 지원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일시에 치러야 했던 고통과 충격이 완화된 측면도 있는데 이제 와서 모든 책임을 산은 잘못으로만 몰고 가니 씁쓸하다”고 말했다.

누가 봐도 명백한 잘못에 대해선 응당 책임을 물어야 하지만 ‘결과론적인 판단 책임’을 묻는 것은 구조조정을 되레 방해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김상조 한성대 무역학과 교수는 “구조조정 과정에서의 책임 추궁과 면책은 두 가지로 이뤄져야 한다. 책임을 물으려면 현행법이나 회사 정관 등에 명문화된 ‘선관주의 의무’(선량한 관리자로서의 의무) 위반 등 법률적 책임에 국한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그 예로 미국 저축대부조합(S&L) 사태를 들었다. 1980년대 미국 부동산 버블 당시 S&L이 주택담보대출을 과도하게 해 금융사가 줄파산했다. 이 업종의 예금보호기구마저 파산할 정도였다. 미국은 S&L 사태에서 자유로운 예금보험공사(FDIC)로 하여금 부실 S&L 처리와 함께 책임 추궁을 담당하게 했다. FDIC는 무려 10년에 걸쳐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법률적인 책임을 물어 1만 5000명을 법원에 보냈다.

한 금융권 고위 인사는 “가뜩이나 공직사회의 ‘변양호 신드롬’과 (구조조정에 개입할) 법적 권한이 뚜렷하지 않은 금감원의 지위 때문에 공무원들이 몸을 사리고 있고 (책임 추궁에 더 민감한) 채권단도 갈수록 발을 빼는 분위기”라면서 “지금부터라도 구조조정을 제대로 하려면 똑똑한 면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백민경 기자 white@seoul.co.kr
2016-06-21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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