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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코니에 기댄 시인 적시는 ‘사회의 파도’

발코니에 기댄 시인 적시는 ‘사회의 파도’

오경진 기자
오경진 기자
입력 2023-12-01 01:55
업데이트 2023-12-01 0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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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사회 발코니/박세미 지음/문학과지성사/116쪽/1만 2000원

건축 전문 기자로 장소에 예민해
파묵의 발코니 사진서 영감 얻어
안도 밖도 아닌 공간서 현실 관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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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시내 한 반지하 주택의 창문 바깥에 방범용 철창살이 처져 있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에서 ‘기택’(송강호 분) 가족이 살던 집을 떠올리게 하는 이 철창살은 박세미 시집 ‘오늘 사회 발코니’에 실린 시 ‘일조권’에서도 중요한 이미지로 활용된다. 연합뉴스
서울 시내 한 반지하 주택의 창문 바깥에 방범용 철창살이 처져 있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에서 ‘기택’(송강호 분) 가족이 살던 집을 떠올리게 하는 이 철창살은 박세미 시집 ‘오늘 사회 발코니’에 실린 시 ‘일조권’에서도 중요한 이미지로 활용된다.
연합뉴스
제목이 정직하다. ‘오늘 사회 발코니’. 수록된 시들은 ‘오늘 사회’에서 마주한 일들을 늘어놓는다. 시인은 이렇게 해명한다. “아마 제가 현실이라는 땅에 발을 매립한 상태에서 썼던 시가 일부 있기 때문일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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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미 시인
박세미 시인
박세미 시인의 두 번째 시집 ‘오늘 사회 발코니’가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됐다. 2014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한 박 시인의 시집은 2019년 ‘내가 나일 확률’(문학동네) 이후 4년 만이다.

“철창살 사이로 들어오는 것은 / 빛이 아니라 / 목 잘린 발들이 일으키는 먼지 // 태양의 고도가 높아지고 / 외부가 한낮으로 향해 갈 때 / 어둠이 숨어드는 / 모두가 짙어지면 홀로 더 깊이 짙어지는, 땅보다 낮은 땅에서 // 절대 상하지 않겠다”(‘일조권’)

건축 전문 기자로 활동하는 박 시인의 시는 장소와 공간을 예민하게 들여다본다. 햇빛과 반지하의 관계를 조명한 시 ‘일조권’은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을 떠올리게 한다. 반지하 창문의 방범용 창살 밖으로 보이는 세상은 있는 그대로가 아니다. 어딘가 재단되고 갈라져 왜곡된 세계. 반지하에 사는 이는 그렇게 세상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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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서울 SPC 본사 앞에서 열린 ‘제빵공장 청년 노동자 사망 사건 해결 촉구 기자회견’에서 청년단체 회원들이 사고를 규탄하고 있는 모습. 지난해 SPC그룹 계열사인 SPL의 경기 평택 소재 제빵공장에서 청년 노동자가 사망한 적이 있다. 연합뉴스
지난해 서울 SPC 본사 앞에서 열린 ‘제빵공장 청년 노동자 사망 사건 해결 촉구 기자회견’에서 청년단체 회원들이 사고를 규탄하고 있는 모습. 지난해 SPC그룹 계열사인 SPL의 경기 평택 소재 제빵공장에서 청년 노동자가 사망한 적이 있다.
연합뉴스
“화이트 셔츠 공장”에서는 “검붉은 피가 번지”거나 “옆자리의 동료가 사라지”기도 한다(‘생산 라인’ 부분) 어느 “국숫집의 주인”은 “기계가 그의 손을 반죽인 양 빨아들”이기도 한다(‘일’ 부분) 이토록 끔찍한 고통에도 화자는 당황하거나 슬퍼하지 않는다. 빵 만드는 공장에서 잇따라 사람이 죽어 나가는데도 아무렇지 않은 듯 돌아가는 현실처럼. 죽음에 무감각해진 시대를 직시하는 시인의 눈은 다소 슬프게 느껴지기도 한다. “비로소 기계와 손이 분리되었을 때 / 세 마디로 이루어진 희망은 / 생각보다 더 잘게 부스러지고 굽어지고 있었다”(‘일’ 부분)

시집에서 자주 인용하는 예술가가 장 폴 사르트르인 점은 공교롭다. 프랑스 실존주의 철학자이자 문인인 그는 지식인의 사회참여를 뜻하는 ‘앙가주망’을 공공연히 강조했다. 제목의 일부이기도 한 ‘사회’와 묘하게 겹친다. 시인은 사르트르의 소설 ‘벽’에 쓰인 문장을 시 ‘서프라이즈 박스’에서 한 번, ‘살아 있는 작은 안개가 하는 일’에서 또 한 번 옮겨 적었다. 이 밖에도 ‘장식과 범죄’의 아돌프 로스를 비롯한 미학·건축 거장들이 시 안에서 재치 있게 변주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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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의 하이라이트인 것 같은 시 ‘Balkon’은 튀르키예의 지성 오르한 파묵에게서 받은 영감으로 출발한다. 파묵은 소설 쓰기가 막힐 때마다 발코니에 서서 풍경을 찍었다고 한다. 2012년 12월부터 2013년 4월까지 5개월간 8500여장의 사진을 찍고 이 중 일부를 모아 책으로 내기도 했다.

그래서 ‘발코니’는 어떤 곳인가. 생지옥과도 같은 현실에서 벗어날 구원의 공간인가. “그저 제가 살고 있는 집의 발코니입니다. 구조적으로 볼 때 건물에 부가적으로 매달려 있는 것이면서 안에도 속하지 않고 밖에도 속하지 않은, 안과 밖의 자장에서 벗어난 무중력의 시간입니다. (…) 제 앞에 펼쳐진 것은 그저 바다. 아름답고 무섭고 아득한 사회의 바다. 파도가 밀려오면, 발코니가 흔들거립니다.”(시집에 수록된 시인의 인터뷰 중에서)
오경진 기자
2023-12-01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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